변장한 채 후세인 국왕 왕궁에 잠입한 시몬 페레스… 요르단과의 평화의 길을 열다
이스라엘-아랍 이슬람 국가 간 역대 두 번째 평화 조약 이끌어낸 비밀 회담
이스라엘의 전직 대통령이자 총리였던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서거 10주기를 맞아, 페레스 센터 아카이브는 1993년 페레스와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사이에 이루어졌던 극적인 비밀 회동의 발췌 기록을 공개했다.
1993년 가을, 후세인 국왕은 이스라엘 정부에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시몬 페레스와 은밀한 회동을 가질 의향이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며칠 뒤, 숱이 풍성한 짙은 머리카락에 큼직한 콧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 한 명이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위치한 왕궁으로 들어섰다.
그 콧수염과 가발은 법적으로 여전히 전쟁 상태에 놓여 있던 양국 간 역사적인 평화 협정으로 가는 길을 논의하는 동안 페레스의 신분을 철저히 감추기 위한 변장이었다.
페레스 센터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후세인 국왕은 "방문이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될 것이며, 외무장관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도록 필요한 모든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는 확답을 받았다."
후세인 국왕은 페레스를 이스라엘 측에서 평화 프로세스를 이끌 역량을 갖춘 창의적인 사상가로 평가했다. 양국은 군사적 충돌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이미 수년에 걸쳐 물밑 비밀 접촉을 이어오던 중이었다.
회동 당일 페레스는 비서실장 및 모사드(이스라엘 대외정보기관) 부국장과 함께 정부 전용 차량 대신 도보로 앨런비 다리(Allenby Bridge) 국경을 건넜다. 요르단 측 국경에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한 차량 두 대가 대기 중이었으며, 그중 한 대는 후세인 국왕의 비서실장이 직접 운전하고 있었다.
회담 자리에서 페레스는 경제적 파트너십과 양국 모두에 유익을 줄 수 있는 도로 및 항만 등 인프라 프로젝트를 포함한 중동 지역 협력의 비전을 제시했다.
후세인 국왕은 상호 이익을 도모하는 페레스의 발전 구상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후세인 국왕은 페레스에게 "우리에게는 미래에 대한 많은 꿈과 희망이 있다"며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다음 세대가 진정한 평화인 '안전의 확신' 속에서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뜻을 같이한다"고 말했다.
그는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양국이 마침내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표명했다.
후세인 국왕은 페레스에게 "우리 사이의 파트너십이 온전하다는 나의 확언은 결코 안주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의 접근 방식을 잘 보여주는 창의적인 제안들에 열려 있는 역동적인 파트너십"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후세인 국왕은 합의를 이끌어낼 기회의 창이 곧 닫힐 수도 있다는 깊은 불안감을 내비쳤다.
후세인 국왕은 "내게 남은 시간은 어쩌면 1~2년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것을 걸 생각"이라며 "역사는 질주하는 말과 같다. 그 말을 앞질러 타거나, 아니면 내려서 말이 당신 없이 계속 질주하게 두는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으며 평화를 이룩할 우리의 '기대 수명' 또한 제한되어 있다. 우리 세대는 우리가 사라지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고 페레스에게 호소했다.
요르단 국왕의 이러한 우려는 근거가 분명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압둘라 1세 국왕이 1951년 암살당했으며, 그 자신 역시 여러 차례의 암살 기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후세인 국왕은 페레스에게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내야 하므로 모멘텀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허락된 짧은 시간과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기회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며 "격차가 좁혀질 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들을 위한 희망이 자라날 것이며, 이제 그것이 실현되어야 할 때가 왔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페레스는 이스라엘 대중 역시 평화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화답했다.
"현재 이스라엘 여론에는 평화 협정에 대한 엄청난 지지가 존재합니다. 젊은 세대의 영혼은 전쟁과 빈곤, 자유의 결핍으로 인해 이미 피폐해졌습니다."
회담이 끝날 무렵 후세인 국왕은 하단에 따뜻한 헌사를 적은 자신의 대형 사진을 페레스 장관에게 선물했다.
또한 국왕은 비서실장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것에도 흔쾌히 응했다.
두 지도자는 비공식 합의 문서에 서명했으며, 이 문서는 이후 검토를 위해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당시 이스라엘 총리에게 전달되었다.
페레스와 후세인 국왕의 비밀 회동이 있은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94년 10월, 사해 남쪽 국경 인근의 와디 아라바(Wadi Arava)에서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의 공식 평화 협정이 공식 체결되었다.
이는 1979년 이집트에 이어 아랍·무슬림 국가와 맺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평화 조약이었으며, 이러한 외교적 성과는 2020년 아브라함 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수십 년간 재현되지 못했다. 1948년 독립전쟁 이래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양국 국민이 합법적으로 오갈 수 있는 국경을 공유하게 되었다.
해당 외교 기밀문서들이 공개되자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자 '페레스 평화혁신센터' 이사장인 헤미 페레스(Hemi Peres)는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그 역사적인 만남의 기록을 읽다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 비밀 회동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을 굳게 믿었던 비전가, 페레스의 세계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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