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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LYSIS

서구가 읽기를 거부하는 갈등: 두 개의 경전, 두 개의 문명

 
쿠란과 성경. (사진: 셔터스톡)

서구 사회는 종교를 온전히 읽어내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가장 뿌리 깊은 갈등의 본질을 거듭 오판하곤 한다. 서구의 눈에는 군대, 국경선, 역사적 원한, 테러리즘, 외교적 수사, 선거 공학만이 보인다. 정작 한 문명을 형성하고 움직이는 '근본 코드'를 제외한 거의 모든 피상적인 요소들만 바라보는 것이다.

문명은 시장이나 군대만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문명은 기초가 되는 경전과 그 경전이 창조해 내는 세계관 위에 구축된다. 법률이 의회를 통과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도덕적·종교적 의식 속에서 그려지며, 가시적인 제도가 형태를 갖추기 전에 기원과 권위, 정의, 예배, 궁극적 운명에 대한 서사가 그 틀을 빚어낸다.

따라서 계시된 경전은 단순한 개인의 신앙 서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운영 체제(OS)'다. 현실을 규정하고, 시간을 배열하며, 정체성을 형성하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율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악이란 무엇이며 구원이란 어떤 의미인지, 나아가 역사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를 인간에게 선포한다.

논의를 진전시키기 전에 방법론적인 전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본 글은 성경과 꾸란을 사회학적 복합성을 지닌 공동체나 신자들의 현실로서가 아니라, '텍스트 그 자체'로서 비교한다. 경전은 독립적인 실체다. 특정 개인이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든 그렇지 않든 간에, 경전은 고유한 주장을 펼치며 하나의 세계를 제시한다. 거룩한 텍스트가 제시하는 바와 그 독자들이 실제로 행하는 바를 구별하는 것은 회피가 아니라 명료한 사고를 위한 필수 전제다. 이어지는 분석은 두 권의 책과 그것이 생성해 내는 세계에 관한 것이며, 양측 경전을 따르는 개별 신자에 대한 도덕적 심판이 아니다.

성경과 꾸란은 단순히 몇몇 공통된 등장인물을 공유하는 두 종교 텍스트가 아니다. 두 책은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경쟁적 문명 건축물'이다. 둘 다 창조, 계시, 예언자, 법, 심판, 예배,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논하며 보편적인 진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문명의 가장 기초적인 질문들—하나님은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율법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누구인가? 역사는 어디로 향하는가?—에 대해 완전히 다른 답을 내놓는다.

이슬람과 서구 사이의 갈등을 단순한 무장 투쟁, 테러리즘, 빈곤, 식민주의, 외교 정책, 혹은 현대의 극단주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한 요인들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근본 뿌리가 아니다. 그것은 두 개의 신성한 코드 사이에 존재하는 훨씬 깊은 충돌이 겉으로 드러난 징후에 불과하다.

지난 1,400년 동안 성경적 세계와 꾸란적 세계는 현실을 동일한 방식으로 인식하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마찰을 빚어왔다. 현대 서구는 이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종교를 사적인 신념으로 치부하고, 정치를 진정한 갈등의 장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된 경전에 의해 형성된 문명에서 정치는 언제나 신학의 하류에 위치한다. 거룩한 텍스트는 결코 기도실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법이 되고, 기억이 되며, 정체성, 공동체, 영토, 전쟁과 평화, 그리고 궁극적인 역사의 운명이 된다.

서구 도덕적 상상력의 기초 코드로서 성경은 언약(Covenant), 양심, 도덕적 책임, 그리고 메시아적 소망을 중심으로 구축된 문명을 탄생시켰다. 성경의 서사는 창조에서 시작하여 타락과 약속을 거치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통로를 지나 토라, 왕국, 포로기, 예언을 거쳐 발전하며, 마침내 메시아와 만물의 회복으로 절정에 이른다.

성경적 코드의 핵심에는 '언약'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은 약속을 통해 스스로를 구속하신다. 역사 속으로 친히 들어오시며, 선택하시고, 명령하시며, 심판하시고, 구속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에게, 다윗에게 약속하시며 예언자들을 통해 새 언약을 선포하신다. 따라서 성경적 세계는 단순한 신적 권능의 세계가 아니라 '신적 신실하심(Divine Faithfulness)'의 세계다.

이것은 문명의 형성에 있어 막대한 차이를 낳는다. 하나님이 언약적 존재라면 권력은 결코 자의적일 수 없다. 권력에는 도덕적 책임이 뒤따른다. 예언자는 왕을 책망할 수 있고, 제국은 심판의 저울에 달려 자격 미달로 판정받을 수 있다. 법은 통치자 위에 군림한다. 약자, 과부, 고아, 나그네가 도덕적 시야 안으로 들어온다. 인간은 권력의 단순한 신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엄한 존재다. 국가 위에 존재하는 법, 책임지는 통치자, 양심의 존엄성, 개인의 신성함, 하나님 앞에 답변해야 하는 국가라는 서구의 가장 깊은 가치관들이 바로 이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반면 꾸란은 다른 문명적 코드를 제시한다. 꾸란은 사적인 영성의 책이 아니다. 하나님, 계시, 법, 예배, 공동체, 그리고 인류의 운명에 대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무함마드를 예언자들의 봉인(최종 예언자)으로, 꾸란을 최후의 결정적 계시로 제시하며, 이슬람을 알라를 향한 '복종(Submission)'의 회복된 보편 종교로 선언한다. 또한 사적인 헌신을 훨씬 뛰어넘어 법적, 사회적, 도덕적, 문명적 함의를 갖는 초국가적 종교 공동체인 '움마(Ummah)'를 형성한다.

동시에 꾸란은 자체적인 내적 논리에 따라 본질적으로 논쟁적(변증적)인 성격을 띤다. 서기 7세기에 등장한 꾸란은 종교적 공백 상태에 진입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히브리 성경, 신약성경, 그리고 수 세기에 걸친 유대-기독교 문명에 의해 형성된 세계 속으로 들어왔다. 꾸란은 그 세계를 향해 발언하며 그것을 다시 쓴다. 이전의 경전들이 오해되었거나 변질되었거나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며, 오직 자신의 계시만이 상실된 진리를 온전히 회복한다고 선언한다. 이는 우연한 특징이 아니라 구조적인 본질이다. 꾸란은 스스로를 성경적 전통에 대한 교정자로 규정한다. 따라서 이 두 코드를 비교하는 것은 무관한 두 체계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텍스트를 명시적으로 반박하고 재정의하는 후대 텍스트를 읽는 일이다.

이슬람의 중심 조직 원리는 이스라엘을 거쳐 메시아로 향하는 성경적 언약이 아니다. 최종 계시를 통한 '알라를 향한 복종'이다. 인간의 근본 문제 역시 메시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치유되는 언약적 단절이 아니라, 예언자들과 최종적으로 무함마드를 통해 계시된 알라의 인도하심에 복종하지 못한 불순종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당신의 언약적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실 것인가를 묻는다. 반면 꾸란은 인류가 무함마드를 통한 알라의 최종 계시에 복종할 것인가를 묻는다. 이 둘은 동일한 목적지로 향하는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애초에 서로 다른 문명을 가동하는 엔진이다.

성경적 코드에서는 보편성에 앞서 특수성이 선행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약속은 이삭과 야곱을 거치며,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으로 빚어진다. 만국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복을 받으며,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통해 오신다. 구원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열방으로 뻗어 나간다.

그러나 꾸란의 코드에서는 서사가 완전히 재배열된다. 예언자들은 각 민족에게 파견되고, 이전의 경전들은 훼손되었거나 대체된 것으로 취급된다. 무함마드는 최종 예언자로, 꾸란은 최후의 경전으로 도래한다. 그 결과는 성경 이야기의 연속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신학적 틀 안에서 이야기를 완전히 다시 쓴 대체물이다.

양측 경전이 공유하는 인물 이름들이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꾸란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 마리아, 예수를 언급한다. 그러나 이 인물들은 전혀 다른 신학적 세계로 재배치된다. 그들의 의미는 또 다른 코드에 의해 재해석된다. 언뜻 연속성처럼 보이는 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상 '대체(Replacement)'다.

아브라함이 가장 명확한 예다. 성경에서 언약의 계선은 이삭, 야곱, 이스라엘을 거쳐 메시아로 이어진다. 반면 이슬람에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카바 신전의 성스러운 전당과 결부된다. 이는 전혀 다른 거룩한 지리와 아브라함에 대한 전혀 다른 기억을 낳는다. 성경이 역사를 시온,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다윗의 소망으로 향하게 한다면, 이슬람은 예배자의 몸을 메카와 카바, 그리고 복종의 보편 공동체로 향하게 만든다.

신성한 지리는 문명을 형성한다. 한 민족의 거룩한 장소는 역사의 중심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준다. 한 문명은 역사의 언약적·메시아적 중심으로서 시온을 바라보지만, 다른 문명은 복종의 중심으로서 메카를 향해 돌아선다. 이는 단순한 미학적 차이가 아니라, 세계의 궁극적 의미를 규정하는 지도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극명한 분기점은 바로 예수다.

이슬람은 예수를 무시하지 않는다. 예언자이자 메신저로서 경의를 표하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탄생을 말하며, 거룩한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예수에 대해 증언하는 핵심적인 주장들은 전면 부인한다. 신적인 아들이 아니며, 성육신하신 말씀도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주도 아니며, 대속의 어린양도 아니고, 구원 역사의 중심에 계신 부활하신 주님도 아니다.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정체성은 완전히 뒤바뀐다. 성경은 예수를 육신이 되신 말씀—하나님의 아들, 어린양, 새 언약의 중보자, 흘리신 피로써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으로 제시한다. 꾸란은 예수에게 경의를 표하는 척하면서 이러한 핵심을 근본적으로 해체한다. 신적 아들 됨을 부정하며, 십자가 사건을 대속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구속은 메시아의 피를 통해 오지만, 이슬람에서 인도는 알라의 최종 계시를 통해 온다. 이것은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둘러싼 사소한 변주가 아니라, 역사의 중심 질문을 두고 정반대의 답을 내놓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로 이어진다. 진지한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두 전통이 서로 다른 언약적 틀 안에서 동일한 하나님을 묘사한다는 주장과, 텍스트 상 완전히 다른 신적 존재를 기술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 왔다. 본 분석은 텍스트 자체가 신적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기초하여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언약 안으로 들어가시고, 약속으로 스스로를 묶으시며,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고, 아들의 위격으로 친히 오시며, 피로써 구속하시고, 성령을 보내시며, 메시아를 통해 피조 세계를 온전히 회복하신다. 반면 이슬람에 계시된 알라는 명령하고, 인도하며, 예언자를 보내고, 무함마드를 통해 최종 계시를 내리지만 대속의 피로 구속하지 않는다. 이는 동일한 신을 다른 어휘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누구이며, 무엇을 행하시고, 궁극적으로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에 대한 완전히 다른 서술이다.

법은 신학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성경적 전통은 법이 통치자 위에 서 있는 도덕적·법적 상상력을 낳는다. 왕은 신이 아니며, 예언자는 군주를 준엄하게 꾸짖을 수 있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 자신조차 그들을 택하신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양심, 도덕적 책임성, 그리고 정치 권력의 한계를 규정하는 토양이 되었다.

반면 이슬람법은 전혀 다른 구조에서 탄생한다. 신적 명령은 단순한 도덕적 영감에 머무르지 않고 예배, 가정, 상속, 공공 도덕, 공동체 경계, 사회생활 전반을 다스리는 포괄적인 문명 질서 그 자체가 된다. 이슬람이 문명적 온전성을 갖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에서, 그것은 사적인 영역에 얌전히 갇혀 있지 않는다. 알라의 주권 아래 삶 전체를 질서화하고자 한다.

문제는 해당 텍스트를 읽는 사람들의 사회학적 다양성이 아니다. 삶에 대한 총체적 비전으로서 그 신성한 코드 자체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이다.

서구 사회가 즐겨 쓰는 '이슬람주의(Islamism)'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얕은 범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구는 마치 본래 사적인 종교였던 이슬람이 정치적으로 왜곡된 것이 문제인 양 말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근대 자유주의적 의미에서 한 번도 사적인 영역에 머무는 종교였던 적이 없다. 애초에 예배와 법, 공동체, 공공 질서에 대한 총체적인 주권적 주장을 품고 태어났다. 이슬람주의가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문명적 긴장을 새롭게 발명해 낸 것이 아니다. 이미 거룩한 코드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 있던 요소들을 현대화하고, 정치화하며, 군사화했을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 서구가 직면한 과제는 단순한 대테러 대책이나 이민자 통합 정책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문명적 문해력(Civilizational Literacy)'의 결핍 문제다. 스스로의 성경적 기초를 잊어버린 세속화된 서구는, 여전히 자신의 거룩한 코드를 절대적인 진지함으로 대하는 종교 문명을 온전히 이해할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

탈기독교화된 서구 사회 내부에서 '문명 안의 또 다른 문명'이 태동할 수 있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는 인종이나 이민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를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하는 문명 체계 안에서, 삶 전체를 포괄적으로 규율하는 신성한 코드가 영구히 사유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음식, 음악, 관습의 다양성은 얼마든지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법, 절대적인 충성, 문명적 운명에 대한 비전의 이질성은 전혀 다른 문제다. 신성한 코드가 공동체의 압력을 통해 신성모독 처벌 규범을 강제하고, 가족법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는 병행 사법 체계를 요구하며, 배교와 같은 사안에서 개인의 양심을 억누르는 권위 구조를 내세운다면, 그것은 자유 사회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 사회가 무엇인지, 나아가 그러한 자유 사회가 과연 존속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을 들이미는 것이다.

이러한 충돌이 가장 극명하게 가시화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단순한 정치적 분쟁 지역이 아니다. 경쟁하는 거룩한 역사들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진앙이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의 언약, 다윗의 왕권, 성전 제사, 예언자적 소망, 메시아적 기대, 그리고 열방의 궁극적인 회복과 직결되어 있다. 시온은 신학이 지리가 되는 장소이며, 언약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고 이스라엘과 열방의 운명이 예언적으로 응축되는 곳이다.

이슬람은 예루살렘을 자신의 신성한 지도 안으로 흡수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기억과 지배, 그리고 종말론적 상상력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슬람 안에서 맡는 역할은 성경 안에서 갖는 위상과 결코 같지 않다. 성경적 코드에서 예루살렘은 역사의 언약적·메시아적 중심이다. 반면 이슬람의 코드에서 예루살렘은 존중받고 영유권이 주장되지만, 궁극적으로 무함마드를 통한 계시에 중심을 두고 메카를 향해 의례적으로 방향을 잡는 신성한 질서 내부의 한 요소로 포섭된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갈등이 부동산 분쟁이나 외교적 난제, 혹은 민족 간의 밥그릇 싸움으로 환원되어 해결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아래에 깔린 질문은 훨씬 더 근본적이다. '어느 신성한 코드가 이 도시에 대한 궁극적 정의권을 갖는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읍이자, 다윗의 약속된 아들의 보좌가 놓일 도성이며,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열방으로 흘러나갈 발원지인가? 아니면 이슬람의 신성한 지리와 역사적 운명 안에서 완전히 재해석되어야 할 도시인가?

이곳이 바로 종말론적 뇌관이다. 예루살렘은 역사에 대한 거대한 논쟁이 구체적인 현실로 육화되는 곳이며, 경전이 외교가 되고, 신학이 지리가 되며,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상반된 두 비전이 단 하나의 물리적 공간에서 격돌하는 장소다.

이러한 분석이 개별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이나 성경과 꾸란에 의해 형성된 사회들에 대한 단순한 도덕적 단죄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독교인들 역시 성경의 가르침을 수없이 배신해 왔고, 무슬림들 또한 역사 속에서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왔다. 지상의 어떤 문명도 경전의 가르침을 완벽하고 순수하게 대변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경전 자체의 실체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 두 코드가 서로 양립할 수 있다는 착각을 정당화해 주지도 못한다.

성경과 꾸란은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두 책은 동일한 하나님을 제시하지 않으며, 같은 예수, 같은 율법, 같은 신성한 지리, 인류를 향한 동일한 궁극적 운명을 말하지 않는다. 이름은 공유할지언정, 그 이름에 담긴 의미는 결코 공유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가 극단주의만 걷어내면 본질적으로 사적이고, 대체 가능하며, 상호 호환될 수 있다고 여기는 서구의 오랜 맹신은 중대한 지적 오류다. 그러한 가정은 세속적 자유주의가 낳은 산물일 뿐, 경전에 대한 엄밀한 분석에서 나온 결론이 아니다. 거룩한 코드는 서로 뒤바꿔 끼울 수 있는 부품이 아니며, 단순한 장식품도 아니다. 그것은 문명 그 자체를 낳고 지탱하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갈등은 온건파와 극단주의자, 혹은 평화와 호전성 사이의 대립이 아니다. 하나님, 인간, 율법, 계시, 구속, 거룩한 지리, 그리고 역사의 종말에 대한 완전히 다른 두 세계관의 충돌이다. 이슬람주의는 이러한 심층적인 현실이 현대에 발현된 한 형태일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본질은 성경과 꾸란이 인류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 결코 융합될 수 없는 비전을 지닌,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개의 문명 운영 체제라는 사실이다.

하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야곱, 이스라엘, 다윗, 그리고 메시아를 거쳐 온 열방으로 향하는 '언약적이며 메시아적인 체계'다.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 예수, 그리고 만국을 무함마드와 꾸란, 그리고 움마를 중심으로 재배열하는 '복종에 기초한 예언자적 체계'다. 전자는 역사를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으로 바라보지만, 후자는 역사를 점진적으로 복종을 요구하는 부름의 과정으로 바라본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 던져진 궁극적인 질문은, 문명을 '신성한 코드'의 차원에서 읽어낼 수 있는 통찰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가이다. 그 문해력을 되찾지 못한다면 서구는 이 갈등을 계속해서 오진할 수밖에 없다. 신학적 주장을 정치적 불만으로, 거룩한 지리를 단순한 부동산 분쟁으로, 종교적 법률 체계를 정책적 선호로, 그리고 종말론적 비전을 단순한 극단주의로 치부하며 겉핥기식 대응만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서구가 계시된 텍스트를 문명을 구축하는 설계도로 읽어내는 법을 다시 배우지 못하는 한, 이 시대를 뒤흔드는 근원적인 힘 앞에서 끊임없이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다. 언약과 예언, 그리고 열방의 운명이 한데 모여드는 성읍 예루살렘은, 성경이 역사의 종말을 바라보는 그 자리에서 오직 정치만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