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란에 등장하는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될 수 있는가?
하나님과 성경, 이스라엘에 대한 이슬람의 근본적인 이의 제기에 메시아닉 유대인이 답하다
2부작 중 1부
꾸란은 기독교인이라면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지위를 예수에게 부여한다. 예수는 메시아이며, 마리아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이며,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표적을 행할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다. 그러나 꾸란은 초기 유대인 제자들이 고백했던 사실,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한 예슈아가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 신적 정체성과 영광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논쟁의 핵심은 예수가 중요한 존재인지가 아니라, 예수에 관한 누구의 설명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메시아닉 유대인의 답변은 쉐마에서 출발해 이스라엘의 성경과 초기 유대인들의 증언, 그리고 꾸란 자체가 앞선 계시에 호소하는 내용을 기준으로 양측의 주장을 검토한다.
이슬람이 제기하는 실제 도전에서 출발하자
수라 4장 171절은 예수를 사도이자 마리아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이라고 부르면서도 기독교인들에게 “셋”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수라 5장 72~75절은 메시아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을 부정하며, 수라 5장 116절은 예수가 사람들에게 자신과 마리아를 신으로 섬기라고 말했는지를 묻는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타협 없이 고백하는 이슬람의 타우히드(tawhid) 사상을 표현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우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동시에 분명하게 답해야 한다. 마리아는 신이 아니며, 삼위일체는 마리아를 하나님으로 포함하거나 숭배하지 않는다. 꾸란이 예수에게 부여하는 칭호들은 그를 높이지만, 그 자체로 기독교 교리를 입증하지는 않는다. 핵심 질문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불렀던 초기 유대인 증인들의 증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은 세 신의 존재도, 신적인 가족도, 마리아를 통한 육체적 생식도 아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생물학적 출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으며(출애굽기 4:22), 다윗 계열의 왕도 그러했다(시편 2:7).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만으로 신성을 입증할 수는 없다. 기독교의 주장은 신약성경이 그리는 예수의 전체적인 모습에 근거한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며, 예수는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고, 초기 유대인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했다는 것이다.
세 신이 아닌 한 분 하나님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출발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시다”(신명기 6:4). 삼위일체는 세 신을 주장하거나 서로 모순되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주장하는 교리가 아니다. 삼위일체는 한 분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구별되는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고 고백한다. 각 위격은 온전한 하나님이지, 하나님의 3분의 1이 아니다. 세 위격이 구별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적 존재가 셋으로 나뉘는 것도 아니다. ‘하나’와 ‘셋’은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한다. 하나님은 무엇이신가,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부터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이다. ‘존재’와 ‘위격’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형성된 신학적 언어이지, 그 자체가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는 아니다. 이 용어들은 기독교인들이 세 신이 아닌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준다. 그러나 성경적 근거는 성경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적 논증은 하나의 히브리어 단어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증거를 종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의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성령을 통해 역사하신다고 기록하지만, 완성된 형태의 니케아 신경 공식이 담겨 있지는 않다. 신약성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셨다고 기록한다(요한복음 1:1~18).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요한복음 20:28). 바울은 “한 분 하나님 곧 아버지”라는 고백 안에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놓는다(고린도전서 8:6). 이는 후대 공의회가 열리기 전, 유대인 운동 안에서 제기된 1세기의 주장들이다. 신약성경 학자 리처드 보컴은 예수를 하나님의 고유한 정체성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무슬림은 이러한 해석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하나님께 동반자를 두는 행위인 시르크(shirk)라고 부르는 것은 반대 이유를 명명하는 것일 뿐, 왜 초기 유대인 제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말했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기독교의 주장은 두 번째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메시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문제는 신약성경의 증언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느냐에 있다.
성경은 오히려 무함마드를 가리키는가?
무슬림 해석자들은 신명기 18장 15~18절, 요한복음 14~16장에 나오는 예수의 보혜사 약속, 그리고 예수가 아흐마드의 도래를 예고했다는 꾸란의 주장(수라 61:6)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는 진지하게 다뤄야 할 주장들이지만, 단순한 유사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명기는 약속된 선지자를 이스라엘 자체의 언약적 삶 안에 위치시키며, 신약성경은 이 구절을 예수에게 적용한다(사도행전 3:22~26). 요한은 보혜사를 성령으로 명시하며, 성령은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하고 그들 안에 거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신다고 설명한다(요한복음 14:17, 26). 후대의 경전이 앞선 경전을 재해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앞선 본문의 표현과 배경, 최초 독자들이 그 본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복음은 변조되었는가?
꾸란은 토라와 복음을 하나님에게서 온 계시라고 부르며(수라 3:3),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시하신 것으로 판단하라고 명령한다(수라 5:47). 또한 성서의 백성들에게 두 경전을 모두 지키라고 촉구한다(수라 5:68). 무슬림들은 꾸란을 이전 경전의 수호자 또는 판단 기준으로 묘사하는 수라 5장 48절도 근거로 제시하며, 예수에게 주어진 원래의 인질(Injil, 복음)과 사복음서를 구분한다. 왜곡이나 변조를 뜻하는 타흐리프(taḥrīf)에 대한 무슬림들의 설명은 다양하다. 본문 자체의 변경, 해석의 왜곡, 은폐, 또는 이러한 요소들의 결합으로 설명된다(이 논쟁에 관한 학술 연구). 기독교 경전의 본문이 다른 것으로 대체됐다고 주장하려면 무엇이, 언제, 어떤 증거에 따라 변경됐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성경 사본들에는 실제로 차이들이 존재하며, 기독교인들은 이를 인정하고 연구해야 한다. 기원전 1세기의 이사야 대두루마리(Great Isaiah Scroll)는 일부 구절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후대의 마소라 본문과 대체로 가깝다(사본 비교). 사해문서는 오류가 전혀 없는 단 하나의 사본이 아니라, 고대의 여러 본문 전승을 보존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사본 기록 역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3세기로 넘어갈 무렵 필사된 파피루스 46에는 바울의 서신들이 보존돼 있으며, 4세기의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에는 완전한 신약성경이 담겨 있다. 1세기에 기록된 바울의 서신들은 이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있었다(고린도전서 15:3~8). 이러한 사본들이 기독교 신학을 입증하거나 그보다 앞선 시기의 모든 변조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이 이슬람이 등장하기 수세기 전부터 선포됐다는 사실은 보여준다. 경전 전체가 광범위하게 변조됐다는 이론은 이러한 초기 기록을 설명해야 한다. 또한 꾸란이 왜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계시를 따르라고 명령하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존재가 아닌 유대인의 메시아
메시아닉 유대교는 예수를 찾기 위해 이스라엘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성경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예슈아를 고백한다. 꾸란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부르지만, 이 칭호를 다윗과 맺은 언약이나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소망을 통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은 그렇게 설명한다. 기독교인들은 사무엘하 7장, 이사야 52장 13절~53장 12절, 시편 22편, 스가랴 12장 10절에서 약속된 왕과 고난받는 종, 그리고 마침내 의로움이 입증되는 존재에 관한 말씀을 읽는다. 유대교 해석자들 사이에는 의견 차이가 있다. 기독교의 주장은 이스라엘의 초기 제자들이 이러한 소망들이 예슈아 안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예슈아를 메시아로 고백한 최초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를 믿는다고 해서 유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이스라엘의 본래 가지들을 향해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로마서 11:17~29). 이스라엘의 성경을 존중한다고 주장하는 교회라면 대체신학, 곧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밀어내고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다른 곳으로 옮기셨다는 주장을 거부해야 한다. 꾸란이 예수에게 부여한 ‘메시아’라는 칭호는 우리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이끈다. 예슈아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분리된 메시아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모든 민족에게 소망의 길을 여시는 메시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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