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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약한 지붕 아래서, 우리는 누구를 신뢰하는가?

초막절을 맞으며, 숨겨진 권력에 대한 토라의 경고는 뜻밖의 약속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목소리 없이 버려두지 않으셨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초막(수카). (사진: 셔터스톡)

초막(수카, sukkah)은 하늘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것이 초막이 주는 교훈의 일부다. 유대인 가정들은 금요일 일몰과 함께 시작되는 초막절(수콧, Sukkot)을 준비하며, 이스라엘의 광야 시절을 상기시키는 임시 거처를 짓는다. 그 벽은 함께 식사를 나누기에는 충분히 튼튼할지 모르나, 그 지붕은 그 아래 머무는 모든 이에게 인간이 지은 어떤 처소도 온전할 수 없음을 일깨운다.

대속죄일(욤 키푸르, Yom Kippur)의 참회 기도를 드린 지 불과 며칠 만에, 그 연약한 지붕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용서와 보호,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갈망할 때, 우리는 과연 어디로 향하는가?

이 질문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비밀스러운 지식, 주문처럼 외우는 거룩한 이름, 해를 막아준다고 믿는 부적 같은 물건 속에서 답을 찾으려는 유혹 또한 그만큼 오래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두려움과 영적 갈망은 종종 나란히 찾아오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갈망을 조롱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갈망을 어디로 가져가야 할지를 명확히 알려준다.

경고 뒤에 주어지는 약속

신명기 18장 9–14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복술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이나 신접자, 박수나 초혼자를 찾는 행위를 엄격히 금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한 수단으로 지식과 힘을 구해서는 안 된다.

이 금지 조항만을 읽고 멈출 수도 있다. 그러나 그다음 구절을 읽어야 한다. 모세는 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동족 가운데서 한 예언자(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니, 이스라엘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선언한다(신명기 18:15–19).

이 순서야말로 본문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음성을 구하는 금지된 통로들을 닫으신 뒤, 친히 말씀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닿기 위한 비법을 터득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듣는 것'이다.

예슈아(Yeshua)를 따랐던 초기 유대인 제자들은 이 약속이 바로 그분을 가리키는 것임을 깨달았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메시아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할 때 모세의 이 말씀을 인용했다(사도행전 3:19–26). 청중들은 이 주장을 살펴보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었다. 그 호소에는 은밀하게 감추어진 것이 전혀 없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자신의 성경에 근거하여 공개적으로 이를 선포했다.

영적 지식에 관한 메시아닉적(Messianic) 대화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이 견고한 토대 위다.

카발라(Kabbalah)에 대한 공정한 질문

카발라는 유대교 신비주의 해석의 다채로운 전통이지, 단일한 의식도 아니며 유대교의 또 다른 이름도 아니다. 그 대표적 저작인 조하르(Zohar)는 13세기 후반 스페인에 등장했다. 이를 읽고 해석한 후대의 학자들은 성경과 하나님, 창조, 그리고 기도의 문제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왔다.

예슈아를 따르는 이들은 카발라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확한 이해에 근거해 비판해야 한다.

유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신비주의 문헌을 읽는 것은, 영적인 힘을 부리기 위해 특정한 언어나 물건을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경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장 점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어떤 특정한 행위가 감추어진 지식에 대한 접근을 약속하거나 영적 존재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면, 신명기 18장은 그것을 면밀히 분별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다. 어떤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그 행위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먼저 규명되어야 한다.

이 동일한 기준은 카발라를 넘어선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스도인 역시 기도를 하나님과의 거래 수단으로 변질시킬 수 있다. 어떤 설교자는 성경이 주지 않은 거짓된 확신을 약속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제하려는 욕망은 인간 본연의 보편적인 유혹이다. 이를 오직 타인의 전통 안에서만 지적한다면, 우리 자신의 내면은 점검받지 못한 채 방치될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은 에베소에서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믿음을 갖게 된 후 이를 완전히 버린 사건을 기록한다(사도행전 19:18–20). 이 기록은 복음이 사람들의 실제 삶과 행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낯선 이가 착용한 옷차림이나 장신구만을 보고 그가 은밀한 주술 행위를 하고 있다고 함부로 단정할 권한까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아니다.

붉은 실과 거짓 증언의 위험

손목에 차는 붉은 실 중 일부는 유대 신비주의 전통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마이 유대인 러닝(My Jewish Learning)이 설명하듯, 그 의미는 매우 다양하며 오늘날에는 종교적 영역을 넘어 하나의 패션으로 널리 퍼져 있다.

어떤 이들은 산파가 갓 태어난 아기의 손에 붉은 실을 묶었던 창세기 38장 27–30절을 언급하기도 한다. 창세기는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힌다. 쌍둥이 중 누가 먼저 나왔는지를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이 구절이 오늘날 팔찌를 차는 현대인의 내면적 신념까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붉은 실은 눈에 보인다. 그러나 한 사람의 내면적 확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모호한 외적 사물만을 근거로 타인의 은밀한 신념을 꿰뚫어 보았다고 자부할 때, 우리는 객관적 증거를 주관적 의심으로 대체해 버리고 영적 경각심이라는 미명 아래 이웃을 향해 거짓 증언을 하는 심각한 우를 범하게 된다.

이러한 위험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에 대해 말할 때 특히 극명해진다. 우리는 유대교를 음모론으로 취급하지 않고도 그 가르침을 정당하게 분별할 수 있다. 입증할 수 없는 막연한 의혹으로 유대인 이웃들에게 해명을 요구하지 않고도 예슈아를 담대히 고백할 수 있다. 진리는 결코 그와 같은 비열한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공공연하게 울려 퍼진 초청

레위기 23장 42–43절은 이스라엘이 초막에 거해야 하는 이유를 명시한다. 다음 세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실 때 초막에 거주하게 하셨음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려 함이다. 초막 자체가 초자연적인 보호를 제공하는 신비한 도구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구적인 거처가 없던 시절 이스라엘을 신실하게 먹이시고 입히셨던 주 여호와를 기억하게 하는 표징이다.

요한복음은 예슈아께서 바로 이 초막절에 계셨음을 전한다. 명절의 가장 큰 날, 그분은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부르짖으셨다. 요한은 예슈아께서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증언한다(요한복음 7:2, 37–39).

그 배경을 깊이 묵상해 보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던 광야를 기억하는 명절,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열린 장소에 한 유대인 랍비가 서 계신다. 그분은 감추어진 비밀 공식 따위를 제시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초청은 만인 앞에 공공연하게 울려 퍼졌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기록되고 죄악이 용서받는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과의 새 언약을 예언했다. 그리고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예슈아께서는 자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을 선포하셨다. 예슈아를 따르는 이들은 예레미야가 선포했던 그 은혜의 약속이 바로 그분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고 믿는다.

이것들은 중대하고 무게 있는 진리의 선언들이다. 이는 성경에 비추어 진지하게 숙고되어야 할 진리이며, 근거 없는 혐의로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불안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전해져서는 결코 안 된다.

이번 초막절에도 한 가정이 하늘이 그대로 올려다보이는 지붕 아래 둘러앉을 것이다. 지붕의 틈새들은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나 이 절기는 그 연약한 한계 속에서도 언제나 변함없으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그 나뭇가지 지붕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처럼 가장할 필요가 없다. 겉으로 드러난 사물이 타인의 영혼 상태를 대변한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참된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고 우리를 부른다. 그리고 초막절의 계절, 예슈아의 음성은 여전히 열린 하늘 아래 울려 퍼지고 있다. 목마른 자는 누구든지 와서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