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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프로젝트 ‘빌니쉬’(VILNISH), 유대인 가족들을 위해 필기체 이디시어·히브리어 편지 수천 점 판독·복원 나서

 
세르히 구르비치 박사, 2026년 9월 13일. (사진: 빌뉴스 대학교)

리투아니아 빌뉴스 대학교의 세르히 구르비치(Sergii Gurbych) 연구원이 이디시어와 히브리어로 쓰인 필사 문서들을 인공지능(AI) 기반 소프트웨어로 번역하고 분류하는 프로젝트 ‘빌니쉬(VILNISH)’를 출범시켰다. 이를 통해 동유럽에 뿌리를 둔 유대인 후손들이 베일에 싸여 있던 가문의 역사와 조상의 기록을 복원하도록 돕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는 75세 여성 펠리시타 트루블러드(Felicita Trueblood)가 우크라이나 코노톱(Konotop)의 랍비였던 증조부 파벨 말리소프(Pavel Malisoff)의 편지 50쪽을 마침내 해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서신들은 1927년부터 1934년 사이 증조부가 아들 솔로몬에게 보낸 것들이다.

트루블러드의 당숙인 솔로몬은 해당 시기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그의 부친은 히브리 문자를 사용해 이디시어로 편지를 작성했다. 트루블러드는 이를 직접 읽을 수 없었지만, 전문 번역가를 고용하기에는 비용 부담이 컸다.

미국에 정착한 뒤 성을 '말리스(Malis)'로 바꾼 솔로몬은 대공황기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1985년 세상을 떠났다. 부친이 보낸 편지들은 2013년 발견될 때까지 자녀 중 한 명의 집 벽장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가족들은 이때부터 번역할 방법을 백방으로 수소문해 왔다.

트루블러드는 유대계 통신사 JTA와의 인터뷰에서 "유대인 공동체 밖에서 자라 일상적인 유대감은 없었지만, 내 뿌리에 대해서는 항상 깊은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중 트루블러드는 지난해 말 빌뉴스 대학교 동유럽 유대사 연구 센터의 구르비치 연구원이 시작한 '빌니쉬' 프로젝트에 관한 페이스북 게시물을 접하게 되었다.

전기공학도 출신인 구르비치는 대학 연구진에 합류하기 전 히브리어와 이디시어를 수학했으며, 아카이브에 보관된 유대 문헌을 분석하는 디지털 기술을 개발해 왔다. 그의 핵심 관심 분야는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Interwar period)다. 개인적인 동기뿐만 아니라 가문의 뿌리를 찾으려는 수많은 이들에게 이 시기가 지닌 역사적 중요성 때문이다.

구르비치는 "내 조부가 사셨던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다"며 "조부는 2001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시절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늘 남아있다. 소련 시절을 사셨던 분이라 매우 폐쇄적이셨고, 본인의 유대인 배경이나 전간기 폴란드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셨다"고 털어놓았다.

리투아니아 국립도서관은 전간기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수집된 방대한 양의 일기, 개인 서신, 기사 및 각종 문서를 보존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이디시어와 히브리어 필기체로 작성되어 있어, 구르비치가 유사한 문서들을 판독하고 번역할 수 있도록 AI 언어 모델을 학습시키는 핵심 데이터셋이 되어주었다. 트루블러드의 편지 역시 이 모델을 통해 판독됐다.

지난 5월 트루블러드가 서신 사본들을 구르비치에게 전달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체 문서에 대한 명확한 영문 번역본이 완성되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편지들에는 당시 현지 유대인 공동체가 겪었던 극심한 빈곤과 고난의 세월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말리소프 랍비의 자녀 11명 전원은 결국 소련의 다른 지역이나 캐나다, 미국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이주했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은 소련 전역에 가혹한 궁핍이 닥쳤던 시기였다. 코노톱 지역 역시 이오시프 스탈린 정권의 강제 농업 집단화 정책으로 인해 대기근과 극심한 실업난에 시달렸다.

말리소프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람들이 빵 한 조각도 없이, 마땅한 옷도 걸치지 못한 채 주머니에 동전 몇 푼만을 넣고 굶주리며 반라의 상태로 일자리도 돈도 없이 침묵 속에 거리를 걷고 있다"고 당시의 참상을 전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의 삶을 지탱하던 종교적·문화적 인프라의 붕괴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코셔(유대교 율법에 따른 정결 식품)를 구할 수 없게 된 현실, 안식일과 유대 절기를 지킬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유대교 종교 학교들의 강제 폐쇄 등이 편지 곳곳에 담겼다.

트루블러드는 번역된 편지들이 자신에게 엄청난 위로와 안식을 주었다고 밝혔다. 그녀는 유사한 미해독 필사본을 소장한 다른 유대인 가족들이 구르비치 연구원에게 연락해 빌니쉬 프로젝트가 확장되고, 이 시기 유대인들의 삶에 대한 귀중한 기록들이 더 널리 밝혀지기를 희망했다.

그녀는 "이러한 편지들은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다"며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기록이 수천 점에 달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다른 유대계 기관들 역시 세계대전과 소련 통치 시절 조상들이 겪은 박해에 대해 중·동유럽 각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 청구 증빙 자료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빌니쉬 기술을 도입하는 방안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이 기술은 이스라엘 귀환법에 따라 현지로 이주하려는 이들의 이민(알리야) 자격 요건을 입증하는 가계 증빙 문서를 확인하는 데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