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이스라엘, 그리고 꾸란의 역사적 검증
최초의 목격자들과 유대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지금도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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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예수가 중요한 인물인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두 종교 모두 예수를 존중한다. 차이는 예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특히 메시아닉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인 이스라엘이 여전히 구별된 언약적 소명을 지니고 있는지에 있다. 꾸란에 대한 전통적인 이슬람교의 주류 해석은 십자가 처형을 부정한다. 반면 신약성경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으며, 그의 초기 유대인 추종자들이 그를 메시아로 선포했다고 말한다. 이슬람교의 최후의 예언자에 관한 주장은 때때로 복음서가 변조됐으며 이스라엘의 언약이 다른 것으로 대체됐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강조점의 차이가 아니다. 역사와 계시에 관한 서로 경쟁하는 설명이다. 각각의 주장은 그 출처와 논리,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검증돼야 한다.
십자가는 논쟁의 대상이 되기 전에 공개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꾸란 수라 4장 157~158절은 예수가 살해되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그를 들어 올리셨다고 말한다. 수세기 동안 대부분의 이슬람 해석자들은 이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처형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종종 다른 사람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설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구절 자체는 대체된 인물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며, 사건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일부 현대 이슬람 학자들은 이 구절이 역사적 십자가 처형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적들이 승리했다는 주장을 부정한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상의 논쟁은 인정돼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적인 이슬람 해석과 초기 기독교 증언 사이의 충돌을 없애지는 못한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는 자신이 전해 받았다고 밝힌 메시지가 보존돼 있다. 메시아가 죽고 장사됐으며 부활해 증인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고린도전서 15:3~8). 바울은 꾸란이 등장하기 수세기 전, 예수를 따르던 첫 세대에 속한 인물로서 이 편지를 썼다. 그는 게바와 열두 제자, 야고보, 그 밖의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한다. 바울은 객관적인 외부 관찰자가 아니라 확고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편지가 부활을 실험실에서 입증된 결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초기부터 존재했고, 신앙의 중심에 있었으며, 증언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보여준다. 그것은 교회가 자신의 기원을 잊어버린 지 수세기가 지나서야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울 이전의 전승을 다룬 케임브리지 연구는 이러한 신앙고백이 얼마나 이른 시기에 형성됐을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기독교 운동 외부의 인물이었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 기간 본디오 빌라도의 명령 아래 그리스도가 처형됐다고 기록했다. 타키투스의 기록은 부활을 입증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처형 사실을 뒷받침한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역사가 헬렌 본드는 예수의 죽음을 1세기 초 유월절 무렵으로 보면서도 정확한 연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있다고 지적한다. 십자가는 이슬람교가 등장한 이후 기독교인들이 처음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로마 통치라는 공개적인 역사적 현실 속에 자리하고 있다.
역사적 연구 방법만으로는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키셨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설명이 증거를 가장 잘 설명하는지는 질문할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자신들에게 나타났다고 증언했고, 그 증언을 위해 종종 공개적으로 순교할 각오까지 했던 1세기 추종자들의 증언인가? 아니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는 후대 이슬람교의 주장인가? 바울은 후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기독교인들이 불쌍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무슬림들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동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논쟁은 하나님의 개입이 가능한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서 구출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죽음을 통과해 그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꾸란이 후대에 지니게 된 권위는 그것을 최종 계시로 이미 받아들이는 무슬림에게 이 질문의 답을 결정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꾸란은 1세기에 관한 독립적인 증거로 기능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꾸란의 다른 구절들에서 영감받은 것으로 계시된다고 말하는 초기 신약성경 자료보다 7세기에 등장한 꾸란의 수정된 설명을 왜 우선시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무슬림에게서 “꾸란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라는 답변 이상의 설명을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다
일부 이슬람교의 주장은 십자가가 하나님이 자신의 메시아에게 부여한 존귀함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본다. 하나님이 높이신 예언자를 그의 적들이 패배시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예수가 패배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 자체가 패배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신약성경은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드러난 자리라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속죄를 설명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복음서는 예수를 자신의 의지에 반해 붙잡힌 무관한 희생자로 묘사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는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0:17~18). 바울은 하나님이 메시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말한다(고린도후서 5:19).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비의 대가를 다른 존재에게 떠넘기지 않으신다. 그분이 직접 그 대가를 감당하신다. 부활은 겉으로 드러난 패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무슬림들은 이러한 속죄에 관한 설명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서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통제력을 잃었거나 예언자를 적으로 착각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욱이 피 흘림과 그에 따른 죽음이 없다면 이슬람교에서는 죄가 어떻게 속죄되는가? 죄의 삯은 사망이 아닌가? 무슬림들은 권리로서 천국에 들어가는가, 아니면 자비로 들어가는가? 절대적으로 완전하지 않다면, 또는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해지지 않았다면, 권리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비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알라의 의로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분인가?
꾸란은 책망하는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을 기억한다
꾸란이 묘사하는 유대 민족의 모습은 하나의 판단으로 단순화할 수 없다. 꾸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수라 2:47), 모세가 그들에게 지정된 거룩한 땅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 일을 기록하며(수라 5:21), 이스라엘의 불순종도 정죄한다(수라 5:70). 심지어 성서의 백성에 대해서도 “그들이 모두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수라 3:113). 이슬람 해석자들은 땅에 관한 구절이 현대의 국경이나 주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의 특정 세대에 적용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해석상의 문제다. 그러나 꾸란을 집단적 경멸의 근거나 유대인들이 그 땅과 역사적 연관성이 전혀 없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연관성은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기원전 9세기의 텔단 비문은 성경 외부의 자료에서 ‘다윗의 집’을 언급하고 있으며, 유대인 공동체는 고대 후기와 초기 이슬람 시대를 거치면서도 그 땅에 계속 존재했다. 이러한 사실들이 현대의 국경 문제를 해결하거나 이스라엘의 모든 정책을 의로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이 역사적으로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지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하게 만든다. 유대인의 역사를 인정한다고 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유대감과 경험이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진실한 설명은 두 민족의 역사를 모두 바라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언약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지 않았다
성경적 주장은 고고학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는 그의 후손들과 땅이 포함된다(창세기 17:7~8). 예레미야가 약속한 새 언약은 대체된 다른 민족이 아니라 명시적으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맺어지는 언약이다(예레미야 31:31~37). 바울은 이스라엘이 조상들로 인해 사랑받는 민족이며,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한다(로마서 11:28~29). 이방인 신자들은 이스라엘의 감람나무에 접붙여진 존재이며, 자신들을 지탱하는 가지들을 향해 자랑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는다(로마서 11:17~24).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심판에서 면제된다는 뜻은 아니다. 선지자들은 언약에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이스라엘을 책망한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아모스 3:2). 또한 성경적 언약만으로 현대의 국경과 안보, 정부 정책에 관한 모든 문제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새 언약을 이용해 유대 민족이 지워졌다고 선언할 수 없으며, 무슬림들 역시 꾸란의 책망을 집단적 비난의 정당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정부는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이스라엘의 존재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다른 주장이다.
경멸 없는 유대인의 증언
메시아닉 유대교는 예슈아를 신약성경이 그를 위치시키는 바로 그 자리에 둔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자 열방의 소망으로 보는 것이다. 최초의 증인들은 유대인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 이방 종교를 전파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선포하고, 토라와 선지서와 시편을 펼쳐 보이며, 열방에 회개와 죄 사함을 촉구했다(누가복음 24:25~27, 44~47).
이러한 증언은 기독교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도 정직해야 한다. 교회들은 유대인들을 박해했고, 메시아가 오신 민족을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설교해 왔다. 자랑하지 말라는 바울의 경고는 그러한 교만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성경에 관한 무슬림들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기독교인들은 먼저 자신들의 성경을 왜곡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폐지하지 않았으며, 교회가 유대 민족을 경멸할 권리를 물려받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무슬림 이웃과의 대화는 꾸란이 예수를 존중하는 방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하라. 그런 다음 성경을 펼치고 결정적인 질문들을 던져라. 어느 설명이 증인들이 목격한 사건에 가장 가까운가? 이스라엘의 언약은 메시아의 백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십자가는 예언자의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일 수 있는가? 기독교의 답변에는 대가가 따르며, 그 내용은 분명하다. 예슈아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의 첫 추종자들은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키셨다고 증언했으며, 이스라엘의 언약적 역사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제 독자들에게 주어지는 초청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식사가 되신 하나님의 어린양에 관한 순교한 증인들의 증언을 읽고, 왜 이 사도들과 제자들이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까지 감수하려 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성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반면 무함마드에 따르면 그들의 주님이자 구세주는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실제로 죽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목자에게 그토록 사랑받는 이 양들에게 얼마나 참혹한 속임수가 가해진 것인가. 예수와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왜 무함마드를 통해 이 속임수를 바로잡기까지 거의 700년을 기다리셨는가?
1부: 꾸란의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