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프 트럼펠도르(Yosef Trumpeldor): 한쪽 팔이 없는 평화주의자에서 이스라엘의 군사 영웅이 된 인물
만약 어떤 나라를 위해, 그 나라의 기억 속에 대대로 추모될 가상의 군사 영웅을 만들어내려 한다면, 한쪽 팔이 없는 사회주의자이자 채식주의자, 평화주의자인 치과의사를 상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영웅이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우리의 선입견을 거의 따르지 않는다.
요세프 트럼펠도르(1880-1920)를 소개해 드리겠다. 이스라엘 국가의 군사 영웅인 그는 1920년 텔 하이 방어전 중 영웅적으로 전사했으며, 이 죽음은 유대인들이 최북단을 지키기 위한 투쟁과 영원히 결부되었다. 또한 그의 유언인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는 여러 세대의 이스라엘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880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트럼펠도르는 확고한 시온주의자이자 차르의 충성스러운 신하였으며,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채식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1902년 징집되었을 때, 그는 유대인이 약하고 불충실하다는 반유대주의적 고정관념을 깨뜨리겠다고 결심했다.
그 대가로 그는 한쪽 팔을 잃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중 포르트아르투르 전투에서 부상을 입자, 의사들은 그의 왼쪽 팔을 팔꿈치 위에서 절단해야만 했다. 그는 전장으로 복귀하겠다고 고집했다. “나에게 남은 손은 하나뿐이지만, 바로 오른손입니다.” 그의 용맹함 덕분에 승진과 훈장을 받았다.
1905년, 일본군은 포르트아르투르를 점령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 있던 그는 동료 유대인 포로들을 조직하여 시온주의 협회를 설립했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이스라엘 땅에 사회주의 농업 공동체를 세울 계획을 구상했는데, 이는 최초의 키부츠인 데가니아가 설립되기 수년 전의 일이었다.
러시아로 돌아온 이 훈장 수훈 참전 용사에게는 군 경력을 이어갈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그의 시선은 이제 이스라엘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1912년, 그는 마침내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한쪽 팔로 데가니아의 밭을 일구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그의 개척자 생활을 중단시켰다.
오스만 제국령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러시아 시민으로서, 트럼펠도르는 오스만 제국의 시민권과 병역 의무를 수락하거나 떠나야만 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망명하는 길을 택했고, 그곳에서 제에브 자보틴스키를 만났다. 두 사람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는 데 도움을 줄 유대인 전투 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그러나 영국은 대신 ‘시온 노새 부대’를 창설했고, 이 부대는 갈리폴리 전투에 투입되어 트럼펠도르는 그곳에서 다시 부상을 입었다.
갈리폴리 전투 후 영국은 이 부대를 해산했고, 트럼펠도르와 자보틴스키는 유대인 군단 창설을 촉구하기 위해 런던으로 향했다. 결국 이 계획은 성공했으나, 트럼펠도르는 한쪽 팔이 없다는 이유로 참여할 수 없었기에 1917년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격동의 볼셰비키 혁명 기간 동안 유대인들이 고향을 지킬 수 있도록 돕고, 이스라엘로 이주할 것을 독려했다. 마침내 1919년, 그는 당시 영국의 통치 하에 있던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불과 몇 달 후, 다비드 벤구리온은 트럼펠도르에게 텔 하이 정착지로 가서 방어 체계를 구축하고 현지 상황을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옛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분할되었다. 텔 하이, 메툴라, 하마라, 카파르 길라디는 국경이 불분명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곳은 영국령 팔레스타인이 아닌 프랑스령 시리아의 일부로 지정되어 있었다. 유대인 정착민들은 갈릴리 호수의 중요한 수자원 근처에 유대인의 존재를 확고히 하고자 하여 철수를 거부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아직 주권을 확보하지 못했고, 충분한 군사력을 배치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 지역은 무정부 상태의 공백기에 빠져 있었다. 베두인 갱단들은 이러한 상황을 악용해 돈을 갈취하고, 기독교 마을을 공격하며, 이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유대인 정착촌을 건드리지 않았으나, 1919년이 되자 정착촌들은 빈번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트럼펠도르는 방어 체계를 정비하고, 증원군과 보급품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점을 지도부에 전달했다. 1월에는 하마라를 파괴하고 불태웠으며, 1920년 2월 트럼펠도르는 아랍인들이 이 지역의 모든 유대인 정착촌을 파괴할 의도가 있다고 경고했다.
1920년 3월 1일, 무장한 아랍인 대규모 무리가 텔 하이(Tel Hai)에 도착해 프랑스 군인들을 수색하기 위해 진입을 요구했다. 트럼펠도르는 그들 중 몇 명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수색 도중 한 방어병의 권총을 둘러싸고 대치가 벌어졌고, 총성이 울리자 순식간에 안뜰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트럼펠도르는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텔 하이의 방어대가 크파르 길라디로 대피할 때, 트럼프엘도르는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아마도 잘 알려진 라틴어 격언을 인용한 것일 것이다. 이 문구의 히브리어 버전은 시온주의 운동에 강렬한 영감을 주었으며, 후세 세대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텔 하이 사건 그 자체만으로는 국경이 결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트럼펠도르는 그 국경이 아직 협상 중이던 시기에 유대인 정착지를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이 지역에 존재하던 유대인 정착지들은 갈릴리 팬핸들을 영국령 팔레스타인 내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가 되었으며, 최종적으로 확정된 국경선은 메툴라, 크파르 길라디, 텔 하이를 팔레스타인 측에 포함시켰다. 이 국경선이 결국 이스라엘-레바논 국경이 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트럼펠도르의 유산은 영원히 각인되었다. 그는 국가가 탄생하기 무려 28년 전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었다. 그의 친구 자보틴스키의 지도력 아래 발전한 수정주의 시온주의 청년 운동 단체 ‘베타르(Betar)’는 그를 기리기 위해 ‘브리트 요세프 트럼펠도르(Brit Yosef Trumpeldor)’로 명명되었다. 이스라엘 정치 스펙트럼의 양측 모두 트럼펠도르를 자신들의 인물로 여긴다. 좌파는 그가 노골적인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고, 우파는 그가 자보틴스키와 함께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툴라 바로 남쪽에 이스라엘 도시를 건설할 시기가 되자, 요세프 트럼펠도르와 텔 하이의 다른 일곱 명의 수호자들을 기리기 위해 그 도시의 이름을 ‘여덟 사람의 도시’로 정하기로 결정했다. 히브리어로 ‘키리얏 슈모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