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포화 속 ‘생명’을 그리다… 이스라엘 유대인과 아랍인 서예가, 아랍어 ‘하이(Chai·생명)’ 작품 합작
이스라엘 유대인 여성 엘리셰바 드비르(Elisheva Dvir)는 남다른 구상을 품고 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주로 아랍어가 쓰이는 북부 이스라엘 카르멜산의 드루즈인 마을 이스피야(Isafiya)에 살고 있다. 2023년 10월 7일 참극 이후 전쟁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현실 속에서, 그녀는 유대인과 아랍인, 그리고 모든 인류를 위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프로젝트를 구상해 냈다.
유대인들은 '살아있음' 혹은 '생명'을 뜻하는 히브리어 문자 '하이(Chai, חי)' 펜던트를 목걸이로 착용하곤 한다. 그러나 드비르는 두 언어가 공통의 셈조어(Proto-Semitic) 어원을 공유하며 아랍어에서도 동일한 단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같은 개념을 담은 아랍어 디자인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정치나 종교를 떠나, 생명을 찬미하는 이 유대적 전통을 아랍어로도 확장하여 모든 이의 생명을 축복하고자 한 것이다.
웬디 할룬(Wendy Halloun)은 예루살렘 대통령 관저에도 작품이 걸려 있는 저명한 아랍인 서예가 카밀 도우(Kamil Dow)의 오랜 가족 친구다. 드비르의 아이디어를 전해 들은 할룬은 이 프로젝트에 "빛과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확신하며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드비르는 도우의 자택으로 초대를 받았고, 풍성한 아랍식 환대 속에서 예술적 영감이 피어오르며 깊이 있는 생각과 아이디어가 오갔다.
드비르는 도우에게 "저는 언어에 관심이 많고,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10·7 이후의 삶이 던진 무거운 질문들과 씨름해 왔다. 그러다 보면 언제나 모든 것의 본질인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생각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느 날 마을에 적힌 아랍어 표지판을 보며 '과연 아랍어로 생명(하이)은 어떤 모습일까' 문득 궁금해졌다"며, 숙련된 예술가이자 서예가인 도우를 만난 것이 이 아이디어를 계속 추진할 수 있는 큰 용기가 되었다고 전했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에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확신이 든다. 우리가 이를 펜던트로 제작할 수 있는 예술 작품으로 구현해 낼 수 있다면 좋겠다"며 향후 다른 제품들로 확장될 가능성도 언급했다. 이어 "아랍 문화와 서예 예술의 정수를 담아내고 디자인적 진정성을 갖추어,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 작품이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처음에 기독교인인 도우는 예수께 집중된 메시지를 더 선호했기에 다소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대화가 이어지면서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보여주며 예술 철학을 설명했고, 처음 서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들려주었다.
1970년대만 해도 신문 제호는 도우와 같은 전문 서예가들의 손으로 직접 쓰였다. 어느 날 작업 도중 종이 위에 잉크 한 방울이 튀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잉크 글자를 조합해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방식을 착안하게 되었다.
현재 예루살렘에 소장된 초기작의 판화를 보여주며 도우는 "이것이 나의 초기 작품 중 하나다. 마음에 드는가? 텍스트를 가져와 여기에 적어 넣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칼릴 지브란의 시 "내게 피리를 건네고 노래하라. 노래함이야말로 영원의 비밀이니"라는 구절의 단어들을 예술적으로 엮어낸 것이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구상 미술이 금기시(하람)되었으나, 12세기 무렵 예술가들은 아랍어 문자를 활용해 동물이나 다양한 형상을 빚어내는 정교한 캘리그래피 디자인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도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직접 선택한 글귀의 실제 의미와 직결되는 시각적 이미지를 창작해 낸 선구적인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이후 그는 잠언 31편의 '현숙한 여인'이나 시편 42편의 '시냇물을 찾는 사슴'과 같은 성경 구절들을 감탄을 자아내는 시각 예술로 승화시키며 서예가이자 화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았고, 여러 수상과 표창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예술이 사람들에게 진리와 빛을 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설명하며,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나오는 예수의 아랍어 말씀이 디자인의 핵심을 이루는 거대한 회화 작품을 소개했다.
도우는 또한 아랍어에서 하나님의 성호 중 하나가 '살아계신 분(Living One)'—즉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점을 짚었다. 히브리어로 '엘 하이(El Chai)'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미하듯, 아랍어의 동의어는 '알-하이(Al-Ḥayy, الَحَيّ)'로 '영원히 살아계신 자'를 뜻한다. 이는 영원하며 자존하시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슬람 전통의 하나님의 이름이기도 하다.
도우는 이 표현이 신약성경에도 등장한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의 물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알-마시흐)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사용된 단어라는 것이다.
이 단어는 모든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닌다.
도우는 "당신을 위해 이 글자를 써서 줄 수 있다.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며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아랍어 캘리그래피 도안을 건넸다.
할룬은 이번 기획이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이들을 위한 보편적인 만남의 장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10·7 이후 전쟁의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최근 발생한 비극적인 자살 소식들까지 겹치며 이 지역 전체를 죽음의 문화가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명은 특별하고 존귀한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그 소중함을 똑같이 인정한다면, 우리 사이에는 이미 공통분모가 존재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는 죽음의 문화에 맞서는 생명의 메시지와 같다"며 "비록 생명의 가치 하나만이 우리가 공유하는 유일한 공통점일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함께 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묵직한 어둠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음을 누구나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무언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드비르는 도우가 써준 아랍어 캘리그래피를 주얼리 디자이너에게 전달해 다음 단계 제작 작업에 착수했으며, 이 프로젝트를 히브리어로 '쓰인(written)'을 뜻하는 '카투브(Katuv)' 프로젝트로 명명할 예정이다.
할룬은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이 개념이 어머니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고 전했다. 인류 최초의 어머니인 하와의 이름 역시 '생명'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창세기에서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였기에 '하바(Chavah)'라 불렸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할룬의 딸 역시 목에 히브리어 '하이' 펜던트를 걸고 다닌다.
드비르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결실을 맺는다면, 그녀의 딸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수상 경력에 빛나는 서예가 카밀 도우의 필치로 새겨진 아랍어 버전의 '생명'을 머지않아 목에 걸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