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Israel
Opinion Blog / Guest Columnist
ALL ISRAEL NEWS is committed to a fair and balanced coverage and analysis, and honored to publish a wide-range of opinions. That said, views expressed by guest columnists may not necessarily reflect the views of our staff.
오피니언

오바마의 ‘땅을 빼앗았다’는 주장, 법적·역사적 사실 간과

 
2014년 10월 1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양자 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 피트 수자/백악관 공식 사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최근 벨파스트에서 이스라엘이 국가 수립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땅을 빼앗았다”고 주장한 발언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문서로 입증된 법적·외교적·역사적 기록을 무시하는 것이다. 기밀 해제된 기록물과 국제법의 기초가 되는 문서들을 포함해 이러한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유대 민족의 땅에 대한 권리는 약탈이 아니라 법과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사적 기록: 추방뿐 아니라 피란도 있었다

오바마의 주장은 일방적인 추방 서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역사적 증거는 훨씬 더 복잡한 현실을 보여준다. 알바사, 이크리트, 카프르 비르임, 알쿠바이바와 같이 실제로 추방이 일어난 사례들도 있었지만, 아랍 측의 피란 명령과 권고를 보여주는 방대한 기록도 존재한다. 하이파에서는 1948년 4월 23일 아랍비상위원회가 작성한 당시 문서에 아랍 주민들의 이동이 “자발적이었으며 우리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명시돼 있다. 칼리드 알아즘 전 시리아 총리도 회고록에서 아랍 정부들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떠날 것을 촉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1948년 이후 우리는 난민들의 귀환을 요구해 왔다. … 그러나 정작 그들이 떠나도록 유도한 것은 우리 자신이었다”고 밝혔다.

공포 역시 주민들의 피란에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데이르 야신 전투는 공포를 확산시켰고, 아랍계 예루살렘 지역에서는 전단과 확성기 방송을 통해 “집을 떠나지 않으면 데이르 야신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전달됐다. 팔마흐의 한 증언에서도 “데이르 야신에서 일어난 일은 다른 마을들에서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인정했다. 역사적 증거들을 종합하면 주민들의 이주는 단순한 토지 약탈 때문이 아니라, 군사작전과 추방, 극심한 공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전쟁 자체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법적 기록: 오스만법에 따른 토지 매입

오바마의 주장은 유대인 개인과 단체들이 오스만 제국과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 치밀하게 법적 절차를 준수하며 토지를 취득했다는 사실도 무시한다. 이는 식민주의적 강요가 아니라 쇠퇴해 가던 제국의 법률을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활용한 것이었다. 1858년 오스만 토지법과 1867년 외국인 소유권법은 외국인의 완전한 토지 소유를 허용했다.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여권을 소지한 경우가 많았던 유대인 매입자들은 오스만 토지법과 카피튤레이션 협정에 따른 영사 보호라는 이중 법적 체계 안에서 활동했다.

수르수크 가문의 이즈르엘 계곡 토지 매각과 같은 주요 거래들은 오스만 제국의 법적 틀 안에서 협상됐다. 에드몽 드 로스차일드 남작의 팔레스타인유대인식민협회(PICA)와 유대인식민협회 같은 자선단체들은 오스만 당국이 승인한 토지등기부를 활용해 황무지나 말라리아가 만연한 땅을 생산적인 정착지로 바꿨다. 야파 주재 영국 부영사 하임 암잘락과 오스만 제국의 유대인 기업가 요세프 나본 베이 같은 인물들은 외교 경로를 통해 거래를 중재했다. 1901년 설립된 유대민족기금(JNF)은 이러한 전략을 제도화했다. 한 역사적 분석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오스만령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토지 취득은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변화하는 제국의 체제에 법적으로 정교하게 대응한 결과였다.”

국제법적 기록: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오바마의 주장은 1922년 국제연맹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문서를 무시한다. 이 문서는 “유대 민족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역사적 연관성”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며, 이를 “그 지역에 유대 민족의 국가적 고향을 재건하는 근거”로 규정했다.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이러한 목적을 위해 지정되고 이후 위임통치령 문서로 공식화된 영토에는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유대·사마리아, 가자지구, 요르단이 포함돼 있었다.

메나헴 베긴 총리는 1981년 “자기 나라를 병합할 수는 없기 때문에 병합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병합하는 것은 외국의 땅이다. 자기 나라를 병합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베긴은 이러한 지위의 근거를 단지 고대 성경에만 두지 않고, 구체적인 현대 국제법에 두었다. 위임통치령은 법적 구속력을 가진 국제법으로서, 정해진 영토 안에서 유대 민족에게 특정한 권리를 부여했다. 이후 어떠한 법적 문서도 이러한 권리를 정당하게 소멸시키지 못했다.

유대 민족의 중심지: 유대·사마리아와 가자지구

베긴의 논리가 골란고원에 적용된다면, 유대·사마리아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강력하게 적용된다. 이곳은 3,000년 넘는 유대 역사에서 지리적·영적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족장들의 땅이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던 곳이며, 실로에 성막이 있었고,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린 통일왕국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던 지역이다. 위임통치령은 유대·사마리아 전체를 명시적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1948년부터 1967년까지 요르단의 점령은 불법이었으며 영국과 파키스탄만이 이를 인정했다. 그렇다고 국제연맹이 확인한 유대 민족의 근본적인 권리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가자지구 역시 이러한 법적 틀에 포함된다. 가자지구는 유대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유다 지파에 할당된 지역이었고 위임통치령에도 포함돼 있었다. 1948년부터 1967년까지 이집트의 점령 역시 불법이었으며, 이집트에 합법적인 주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영토에 대해 이스라엘의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병합’이 아니다. 그것은 불법 점령자로부터 “해방된 우리나라의 일부에 이스라엘 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데이르 야신: 신화와 현실

오바마의 서사는 학살과 인종청소라는 혐의에 크게 의존하며, 그 중심에는 데이르 야신 사건이 있다. 그러나 데이르 야신에 관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것은 학살이 아니라 군사작전이었다. 데이르 야신은 예루살렘으로 진입하는 주요 도로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위치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1948년 3월 무렵에는 시리아와 주로 이라크에서 온 군인 약 150명이 이곳에 진지를 구축했다. 마을 주민으로 위장한 아랍 병사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유대인 차량 행렬을 여러 차례 공격했고, 아랍 측은 마을에서 유대인 차량 행렬과 서예루살렘 일부 지역을 정기적으로 포격했다. 이에 유대인 군 지도부는 명백한 전략적 이유로 그해 4월 데이르 야신을 장악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유대인 부대가 마을에 접근할 때 맨 앞에는 확성기를 장착한 트럭이 있었다. 이 트럭은 민간인들에게 마을 뒤편으로 대피하라고 경고했으며, 유대인들은 전투 내내 그 퇴로를 열어두었다. 그 결과 “주민 200명 이상이 아무런 피해 없이 떠났다.” 만약 학살을 저지를 의도였다면 누구에게도 경고하지 않았을 것이며, 마을을 떠나도록 허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투에 앞서 아랍 측은 주택들을 요새화하고 그 안에 이라크 병사들을 배치했다. 주택에는 철문이 설치돼 있었다. 집들이 요새화돼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대부분의 문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열어야 했으며, 이로 인해 아랍 측에서 예상보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부상하거나 사망한 민간인 대부분이 발생한 이유를 설명한다. 남아 있던 아랍인들이 항복하는 척하다가 유대인 병사들에게 발포하자, 일부 유대인들은 아랍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일부 아랍 병사들은 얼굴을 가리는 베일을 착용하고 여성으로 변장했다. 검문을 받던 한 사람이 자신의 정체가 들통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권총을 꺼내 유대인 지휘관을 쏘았다. 이에 분노로 이성을 잃은 그의 동료들은 사방으로 총을 쏘아 주변에 있던 아랍인들을 살해했다. 이르군은 사망자 4명을 포함해 41명의 사상자를 냈다. 현재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의 조사에서 형성된 공통된 견해에 따르면, 아랍 측 사상자는 기존에 알려진 250명이 아니라 사망자 107명과 부상자 12명이었다. 당시 아랍 선전가들과 이후 일부 인사들의 주장과 달리, 여성이 강간당했다는 증거는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인터뷰에 응한 모든 마을 주민은 이러한 의혹을 부인했다.

이른바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몇 명이 다른 아랍 마을들로 보내져 그곳 주민들이 피란하게 됐다는 주장 역시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 대신 붙잡힌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이송됐다가 나중에 석방됐다. 뉴욕타임스의 보도와 같은 초기 기사들은 학살을 암시하는 내용 없이 단순히 전투에 관해서만 보도했다. 전투 다음 날 이르군은 적십자 대표를 마을로 안내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학살의 흔적은 전혀 없었으며, 그 신화는 나중에 만들어졌다. 데이르 야신 전투가 끝난 지 불과 며칠 뒤 실제로 일어난 일은 하다사 병원으로 향하던 유대인 차량 행렬에 대한 아랍 측의 매복 공격이었다. 이 공격으로 의사와 간호사, 환자, 병원장을 포함한 유대인 77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했다. 이 학살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며, 데이르 야신을 서둘러 언급하는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더욱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를 겨냥한 이러한 공격이 이어지고, 유엔 분할안 결정 이후 첫 4개월 동안에만 5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됐음에도 유대인들은 피란하지 않았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 일부 유대인들이 아랍인들을 상대로 전쟁범죄로 분류될 수 있는 잔혹행위를 저지른 사례가 간혹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으며, 신생 유대 국가 지도부의 성향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었다. 베이루트에 있는 아랍 측의 지원을 받는 팔레스타인연구소(Institute for Palestine Studies)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아랍 난민의 “대다수”는 추방당하지 않았으며, “68%”는 이스라엘 병사를 보지도 않은 채 떠났다. 아랍인들은 여러 아랍 국가로 피란할 수 있었던 반면, 1940년대 후반 아랍 국가들에서 추방된 유대인 난민 80만 명 대부분에게는 이스라엘 외에 갈 곳이 없었다.

결론

이스라엘이 “다른 사람들의 땅을 빼앗았다”는 오바마의 규정은 역사적으로나 표현상으로나 중대한 오류다. 오스만 제국의 토지등기부부터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 문서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기록들은 유대인의 토지 취득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민들의 이주는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복잡한 전쟁의 결과였고, 유대 민족의 유대·사마리아와 가자지구에 대한 권리가 국제법에 의해 인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를 약탈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의 재탄생을 위한 길을 열어준 근본적인 법적 문서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중심지에 수천 년 동안 깊이 뿌리내려 온 유대 민족의 부인할 수 없는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